검색결과
-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등 8건 보물 신규 지정<보물 제2041호「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 및 고리자루 큰 칼(咸安 馬甲塚 出土 馬甲 및 環頭大刀)」>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 및 고리자루 큰 칼」을 비롯한 가야문화권 출토 중요 유물 5건과 조선 시대 전적문화재 2건, 조선 전기 도자기 등 총 8건에 대해 보물로 지정하였다. 이번에 지정된 가야 시대 유물 5건은 1980~90년대에 발굴된 합천 옥전과 함안 마갑총 고분 등 대표적인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시기는 5~6세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신비의 왕국으로 알려진 가야의 생활상과 기술 수준에 대한 실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유물들로, 그동안 미진했던 가야 유물에 대한 역사‧학술‧예술적 가치를 재평가하여 보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보물 제2041호「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옷 및 고리자루 큰 칼(咸安 馬甲塚 出土 馬甲 및 環頭大刀)」은 1992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마갑총(馬甲塚) 조사 때 발굴한 유물로, 무덤 주인공의 좌우에 하나씩 매장되었던 것이다. 두 유물은 함께 나온 여러 유물들에 대한 연구 결과, 5세기 아라가야에서 제작하여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철제 말갑 옷은 말머리를 가리는 투구, 목과 가슴을 가리는 경흉갑(頸胸甲, 목가슴드리개), 말의 몸을 가리는 신갑(身甲)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 말갑 옷은 그동안 여러 가야 고분에서 발견된 적이 있으나 원형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된 사례는 거의 없어 희귀성이 높다. 또한, 고리자루 큰 칼은 철을 단조(鍛造, 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모양을 만듦)하거나 철제 위에 상감(象嵌, 무늬를 새김)과 타출(打出, 철판 밑에 모형을 대고 두드려 겉으로 모양을 나오게 함) 기법이 고루 적용되어 가야인들의 철 조련 기술, 공예기법 수준, 조형 감각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철제 무구와 중장기병 전술이 확산되는 양상과 높은 수준의 철기 제작기술이 개발되고 교류된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 유물의 희소성과 완전성 등에서 역사‧학술‧기술사에서 중요한 유물이다. 보물 제2042호「합천 옥전 M3호분 출토 고리자루 큰 칼 일괄(陜川 玉田 M3號墳 出土 環頭大刀 一括)」은 1987년~1988년에 경상대학교 박물관이 옥전 M3호분을 조사하다가 발굴한 유물이다. 옥전 M3호분은 가야 고분 중 비교적 규모가 크고 도굴도 되지 않아 당시 최고 수장(首將)의 묘제(墓制)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무덤이다. * 옥전 고분 중에는 명칭에 ‘M’자가 붙은 사례가 있는데, 이는 발굴지 주변에 큰 구릉 (mound)이 있는 지역을 뜻하는 고고학 용어임 대가야식 ‘고리자루 큰 칼 일괄’ 4점은 여러 점의 칼이 한 무덤에서 일괄로 출토된 최초의 사례이자, 손잡이와 칼 몸통 등을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해 삼국 시대 동종유물 중 제작기술과 형태 등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 4점 중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용봉문 고리자루 큰 칼’의 경우 손잡이 부분에 가는 은선(銀線)으로 전체를 감은 후, 그 위에 매우 얇은 금박을 붙인 흔적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우리나라 전통공예기법인 ‘금부(金?)’의 일종으로, 이미 삼국 시대부터 이러한 기법이 사용되었고 그 전통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확인해준다. * 금부(金?): 금속의 겉표면에 열을 가해 얇은 금박을 붙여 화려함을 극대화한 전통공예기법 ‘합천 옥전 M3호분 출토 고리자루 큰 칼 일괄’은 가야 최고 지배층의 장묘(葬墓) 문화와 한국 전통공예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는 점,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고대사, 고고학 연구에 중요한 기준점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보물 제2043호 「합천 옥전 28호분 출토 금귀걸이(陜川 玉田 二十八號墳 出土 金製耳飾)」 한 쌍도 경상대학교 박물관이 1985~1986년에 옥전 M3호분을 조사하다가 발굴한 것으로, 현존하는 가야 시대 ‘긴 사슬 장식 금귀걸이’ 중 가장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긴 사슬 장식 금귀걸이’는 사슬고리나 S자형 금판고리를 연결하여 기다란 형태를 만든 것으로 신라나 백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야의 독창적인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형식의 금귀걸이는 대체로 5세기 가야 문화권에서 주로 유행했으며, 5세기 후반~6세기에는 일본에도 영향을 끼쳐 가야귀걸이와 유사한 작품이 다수 전래되고 있다. * 일본 규슈[九州] 지방 구마모토현(熊本縣)의 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에서 출토된 6세기 금귀걸이의 경우 합천 옥전 28호분 출토 귀걸이와 매우 흡사하여 가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음 정식 조사를 통해 발굴되었기 때문에 출토지가 확실하고, 5세기 가야의 고유한 형태를 지닌 점, 일본에 영향을 끼친 점, 한 쌍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야 금속공예의 대표작으로 큰 의의가 있는 유물이다. 보물 제2044호「합천 옥전 M4호분 출토 금귀걸이(陜川 玉田 M4號墳 出土 金製耳飾)는 좌‧우 한 쌍이 온전히 남아 있고 무덤의 주인공이 귀에 달았던 곳에서 발견되어 실제 사용된 사실도 확인된 유물이다. 이 귀걸이가 중요한 이유는 가야귀걸이 양식의 가장 대표적이고 특징적인 양식인 가늘고 둥근 주고리(세환이식, 細環耳飾) 아래 속이 빈 공 모양의 장식을 단 것, 그 아래 심엽형(心葉形) 장식을 달고 마지막으로 산치자 열매 모양의 입체형 장식을 단 특징들을 지녔기 때문이다. * 심엽형(心葉形): 나뭇잎(보통 ♡ 모양) 모양 특히, 장식마다 금 알갱이를 테두리에 붙이거나 금선(金線) 형태를 만든 누금세공기법(鏤金細工技法), 금판을 두드려서 요철(凹凸) 효과를 낸 타출기법(打出技法) 등 다양한 공예기법이 적용되어 가야 시대 금속세공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6세기 전반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융성했던 합천 지역 가야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가야귀걸이 중 보기 드물게 누금세공기법과 타출기법이 모두 다 사용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예술 가치가 높다. 보물 제2045호「합천 옥전 M6호분 출토 금귀걸이(陜川 玉田 M6號墳 出土 金製耳飾)」한 쌍은 1991년~1992년까지 경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옥전 M6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목곽(木槨)의 남쪽에 놓인 무덤 주인공의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 옥전 M6호분은 규모가 큰 중형급 무덤으로, 보관(寶冠), 목걸이, 귀걸이, 고리자루 큰 칼(環頭大刀), 화살통, 장식 마구(馬具) 등이 함께 출토되어 옥전지역 고분 중에서도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음 출토지와 발견 위치, 함께 출토된 유물이 확실해 고고학적 맥락이 뚜렷하고 현존하는 가야 산치자형 장식을 가진 금귀걸이 중 상당히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주고리의 2단 중간 장식, 격자형 원통형 금판으로 연결된 공 모양 장식, 인(人)자형 고리에 산치자형 장식을 달고 마지막 끝을 금 알갱이로 마무리한 것은 신라 금귀걸이의 중간식 형태와 가야의 산치자형 끝장식이 결합된 독특한 혼합양식으로, 6세기 가야 지역의 교류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다. 특히, 이렇게 금 알갱이를 장식 끝부분에 붙인 예는 창녕 계성 A지구 고분, 고령 지산동 44-11호분과 45-1호분 귀걸이와 합천 옥전 M4호분 귀걸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가야 지역에서 널리 쓰인 기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가야 금귀걸이의 특징을 잘 간직한 작품이자 이 시기 금속공예의 대표작으로서 의의가 크다. 이외에, 보물 제2056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의「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2(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卷一~二)」는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중요시하는 경전(經典)의 하나로, 우리나라 불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진 대표적 책이다. ‘대불정수능엄경’ 또는 ‘능엄경’이라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 대승불교(大乘佛敎): 일체 중생의 성불(成佛)을 인정한 불교의 흐름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2」(이하 능엄경 권1~2)는 총 10권으로 구성된 내용 중 권1~2에 해당하는 경전으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승려 신총(信聰)에게 대자(大字; 큰 글씨)로 판하본(板下本)을 쓰게 한 뒤 1401년(태종 1년)에 판각하여 간행한 것이다. *판하본(板下本): 목판 불경을 만들기 전에 종이에 먹으로 쓴 불경, 즉 목판본의 원본을 말함 나뭇결의 마모와 종이의 상태로 보아 처음 판각된 이후 조금 늦게 인쇄된 것으로 보이며, 15세기 말까지 사용된 반치음(?)과 옛이응(?) 등의 묵서 기록 또한 간행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특히, 교정 흔적은 「간경도감」(刊經都監) 언해본 간행을 위한 과정으로 판단되어 늦어도 15세기 무렵 인쇄된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동일 판본인 보물 제759호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의 일부 빠진 장수(張數)를 보완해 주고 본문 왼쪽에 일(一), 이(二) 등 해석을 돕기 위한 석독구결(釋讀口訣)의 사례 등이 확인되어 조선시대 구결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 석독구결(釋讀口訣): 한문을 우리말로 풀어 읽을 수 있도록 문장 사이에 달아 놓은 구결 이 책은 조선의 독자적인 필체에 의한 판본으로서, 조선 초기 불경 간행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고 중세 국어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어 보물로 지정하여 연구‧보존할 가치가 있다. 보물 제2057호로 지정된「지리전서동림조담(地理全書洞林照膽)」은 조선 시대 관상감(觀象監) 관원을 선발하는 음양과(陰陽科)의 시험 과목 중 하나로 널리 사용된 풍수지리서다. 중국 오대(五代) 사람인 범월봉(范越鳳)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 관상감: 조선 시대 천문‧지리‧측우(測雨) 등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 * 음양과: 조선 시대 관상감의 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 길흉‧화복을 연구하는 학문)을 담당할 관리를 뽑기 위한 시험 중국에서는 「지리전서동림조담」에 일부 주술적 요소가 있어 주희(朱熹) 등 송대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조선에서는 과시(科試, 국가시험)의 과목으로 채택됐다. 이 사실은 이 책의 내용이 조선 고유의 풍수관(風水觀)을 성립시킨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에서 풍수지리가 역사‧문헌적으로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상권과 하권 2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문은 조선 건국 후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인쇄되었다. 서문이나 발문 그리고 간기(刊記, 펴낸 시기, 주체 등의 기록)가 없어 간행과 관련된 사항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계미자 중자(癸未字 中字)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태종 연간(1400~1418)에는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 계미자 중자(癸未字 中字): 활자의 크기에 따라 대자(大字), 중자(中字), 소자(小字)로 나뉨 조선 시대에 문‧무과(文‧武科)와 생원‧진사(生員‧進士) 선발 시험인 사마과(司馬科) 수험서인 유학서적은 상당수 간행된 데 비해, 잡과(雜果)의 풍수지리서는 수험생이 적어 많이 간행되지 않았으므로 전래본이 매우 희소하다. 간행본이 거의 없는 희귀본이라는 점 외에도 고려 말~조선 초기에 사용된 금속활자인 계미자로 인출되었다는 점, 조선 시대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풍수지리서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역사‧학술‧서지학적 의의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보물 제2058호로 지정된「백자 청화매조죽문 항아리(白磁 靑畵梅鳥竹文 壺)」는 높이 약 27.8cm 크기의 아담한 청화백자 항아리로, 조선 전기인 15~16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뚜껑이 있는 입호(立壺) 형태로, 겉면에 매화(梅), 새(鳥), 대나무(竹)로 구성된 ‘청화(靑畵)’ 물감으로 그린 도자기다. ‘청화’ 물감은 청색의 코발트 안료로,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했으나 1463~1469년 사이에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안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 ‘청화(靑華)’로 한자를 표기하기도 하나, 이는 일본식 용어이고 조선왕조실록 등 옛 문헌에 ‘청화(靑畵)’로 다수 표기되어 있어 현재 학계에서는 ‘靑畵’를 보편적으로 씀 매화를 화면에 크게 배치해 전반적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다양한 동작의 새를 표현해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마치 먹의 농담을 활용하듯 청화안료의 색조와 분위기를 잘 살려냈고, 발색(發色)이 좋아 작품의 품격을 높였다. 이렇듯 수준 높은 기법과 회화 표현을 볼 때 이 작품은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이 참여한 조선 시대 관요(官窯) 백자로 추정된다. * 도화서(圖畵署): 조선 시대 그림을 담당한 관청 * 관요(官窯): 왕실용 도자기를 굽기 위해 나라에서 운영한 가마 국보 제170호 ‘백자 청화매조죽문 유개항아리(白磁 靑畵梅鳥竹文 有蓋壺)’와 비교해 볼 때 뚜껑이 없어 온전한 한 벌이 아닌 점을 제외하면 정제된 백자의 바탕흙(태토, 胎土)과 문양을 장식한 기량이 거의 흡사하다. 이러한 청화백자는 사용계층이 한정되었고 제작 또한 제한되었기 때문에 전래 수량이 많지 않아 희소성이 있다. 제작 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의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시대 변화를 잘 보여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문화재청은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해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체계적으로 보존‧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자료제공 :(www.korea.kr)]
-
경상남도 농식품 유럽 신흥시장 개척- 12월 19 ~ 24일, 네덜란드, 독일 농식품 홍보판촉 행사 개최 - 도내 20개 업체 49개 품목 홍보 및 6만 3천 달러 판매 수익 달성 경상남도(도지사 김경수)가 도내 우수 농식품의 우수성을 알리고 유럽 신흥시장의 개척을 위해 지난 19일부터 24일까지 6일간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대대적인 농식품 홍보․판촉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도내 20개 업체가 생산한 49개 품목을 대상으로 네덜란드 수도인 암스테르담 2개 매장(어메이징 오리엔탈, 신라 마켓)과 로테르담 인터부고 마켓 및 독일 경제․금융의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 에브리데이 플러스 매장 등 4곳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농식품 수출국 다변화와 유럽시장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위해 이정곤 농정국장을 단장으로 관계공무원, 수출업체, ㈜경남무역 등 민관이 함께하는 시장개척단을 운영하여 적극적 제품 홍보와 판매 행사를 통해 6만 3천 달러의 판매 수익을 달성하였다. 또한 시장개척단은 주 네덜란드 대한민국 대사관, 코트라 암스테르담 무역관 및 네덜란드 한인회를 방문하여 경남도 농식품 홍보․판촉 행사 홍보와 함께 유럽시장 진출을 위한 유망품목 발굴과 수출확대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정곤 경상남도 농정국장은 “현지 소비자들에게 한국산 제품이 가격 대비 품질 수준이 높은 것으로 평가 받았으나, 아직까지 일본산 및 유럽산에 비해 인지도가 낮게 평가 받고 있다며, 이번 행사를 발판으로 유럽 프리미엄 시장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홍보와 판촉행사를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고 밝혔다. 이 보도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농식품유통과 정종재 주무관(055-211-6423)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경상남도 농식품 유럽 신흥시장 개척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주왕산 대전사,청송군인재육성장학회에 장학금 1,000만원 기탁(파이널24) 이재덕 기자 =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대전사(주지 법일스님)에서 지난 23일 (재) 청송군인재육성장학회에 장학금 1,000만 원을 전달했다. 672년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대전사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570호’로 지정된 보광전을 간직한 역사 깊은 사찰로 2011년부터 2018년까지 4,500만 원의 장학금을 기탁해 오고 있어, 지역 학생들을 위한 장학 사업에 앞장서고 있다. 법일스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장학금을 전달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무한한 꿈과 가능성을 마음껏 펼치도록 장학금 전달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윤경희(청송군수) 이사장은 “지역인재 양성과 교육 발전을 위해 해마다 기탁해 준 지역의 대표사찰 대전사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학생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신라와 고구려 교류를 밝힐 수 있는 금제귀걸이 출토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의 허가를 받아 (재)화랑문화재연구원(원장 오승연)에서 발굴조사 중인 포항융합기술산업지구 진입도로구간의 포항 흥해읍 대련리 유적에서 금제굵은고리귀걸이(금제태환이식, 金製太環耳飾) 1쌍을 비롯하여 금제가는고리귀걸이(금제세환이식, 金製細環耳飾) 2쌍, 은제팔찌 1쌍 등의 장신구류와 다수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포항 대련리 유적에서는 돌덧널무덤(석곽묘, 石槨墓) 1기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식묘, 橫穴式石室墓) 6기 등 모두 7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대부분의 무덤은 도굴을 당하였으나 무너진 천장돌(개석, 蓋石)이 껴묻거리(부장, 副葬) 유물을 덮고 있었던 4호 무덤은 다행히 도굴꾼의 손길을 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유적에서 가장 큰 4호 무덤은 돌방 길이 5.3m, 너비 1.8m의 긴사각형이며, 주검받침(시상, 屍床)이 상하 2겹으로 겹쳐져 있다. 하층(1차) 주검받침에서는 금제가는고리귀걸이 1쌍, 금제굵은고리귀걸이 1쌍, 은제팔찌 1쌍이, 그리고 상층(2차) 주검받침에서는 금제가는고리귀걸이 1쌍이 각각 출토되었다. 주검받침이 두 번에 걸쳐 만들어진 점, 다수의 귀걸이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4호 무덤에는 3구 이상의 주검이 시간차를 두고 추가로 묻혔던 것으로 판단된다. 금제가는고리귀걸이는 각각 중심고리(주환, 主環)에 샛장식(중간식, 中間飾), 드리개(수하식, 垂下飾)가 결합된 구조로, 천마총과 서봉총, 보문리 부부총, 창녕 송현동고분 등에서 비슷한 귀걸이가 출토된 바 있다. 원통형 샛장식에는 선문(줄무늬, 線紋)과 투각(뚫새김, 透刻)장식을 하였으며, 드리개에는 넓은 나뭇잎형 장식 1매와 작고 오목한 형태의 나뭇잎 모양(측엽, 側葉) 장식 2매가 각각 달려있다. * 샛장식: 귀걸이 고리와 드리개 가운데 부분을 이루는 장식 * 드리개: 매달아 길게 늘이는 물건 금제굵은고리귀걸이도 중심고리 아래에 중앙에 가로로 새김눈금선대(각목대, 刻目帶)가 장식된 소환연접구체(小環連接球體)의 샛장식과 원뿔형의 드리개가 결합되어 있다. 충북 청원 상봉리, 서울 능동, 강릉 병산동 등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의 귀걸이가 출토된 바 있다. 다만 대련리 유적에서 출토된 귀걸이는 샛장식에 새김눈금선대(각목대)가 존재하고 샛장식 아래쪽의 원반상 장식이 생략되는 등 전형적인 고구려산 귀걸이와 차이를 보이고 있어 고구려의 제작 기법을 모방하여 신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함께 돌방 남쪽 끝의 껴묻거리 공간에서는 그릇받침(기대, 器臺), 긴목항아리(장경호, 長頸壺), 굽다리접시(고배, 高杯) 등 다양한 형식의 토기 수십 점이 출토되었다. 발굴기관은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금제귀걸이와 토기들은 경주 외곽에 해당하는 포항 일대의 굴식돌방무덤 수용 시기와 경로,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의 교류관계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4호실에서 나온 금제가는고리귀걸이(금제세환이식, 金製細環耳飾) 중 1쌍>[자료제공 :(www.korea.kr)]
-
갑분싸 NO! 갑자기 분위기 인문학 죽변면도서관 인문학 강연 개최(파이널24) 음수명 기자 = 울진군 죽변면도서관(관장 이성우)은 11월과 오는 12월에 예술 관련 주제로 두 차례 인문학 강연을 개최한다. 먼저 28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에는 서강대 언론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독립영화 및 스마트폰 단편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명호 작가가 “영화로 인문학적 감수성 키우기”라는 주제로 인문학 강연을 실시한다. 12월에는 신라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약 300회의 단체전 및 초대전 전시 경력을 보유한 서양화가 김애경 작가가 세계 명화를 중심으로 “재미있고 유익한 미술이야기”라는 주제로 대한 강연을 펼칠 예정이다. 이성우 죽변면도서관장은 “2019년 도서관에서 여러 인문학 사업을 진행했고 내년을 한 달 앞둔 지금, 군민에게 더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도서관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겠다”며“군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
수많은 이야기와 멋진 설경이 있는 숲지리산은 내륙에서 가장 웅장하고 무엇이든지 품을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은 산이라 누구나 한번쯤 올라가고 싶어하는 산이다. 지리산은 1967년 우리나라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경남 하동, 함양, 산청, 전남 구례, 전북 남원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있다. 둘레가 320여km나 되고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뱀사골 등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계곡들도 자리하고 있다. 2011년에 개통한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주변 마을을 연결하여 독특한 전통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 해마다 60여만 명이 찾아와 둘레길을 걸으며 힐링을 하고 있다. 지리산에는 그 규모만큼이나 수많은 전설과 설화가 있지만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 정상에 올라 평지에서 느낄 수 없는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바라보다보면 천왕봉에 관한 설화가 떠오른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삼신(지리·금강·한라)산의 하나로 신령스런 산으로 여겨졌다. 지리산 바래봉의 설경. 태고적 옥황상제는 마야부인으로부터 ‘지리산을 수호하라’는 명을 받아 지상으로 내려와 신라왕의 꿈에 나타났다. 옥황상제가 ‘지리산 천왕봉에 마야부인의 사당을 짓고 경주옥석으로 마야부인상을 조각하여 사당에 안치하고 지리산 일대의 신장들을 호령하여 산을 수호케 하라’는 말을 하자 신라왕이 이를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또 하나는 고려시대가 배경이다. 그 당시 고려에서는 지리산 일대를 통치하는 관직을 두어 큰 방울을 찬 관원에게 산청·함양·하동·구례·남원을 통치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은 그를 신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공민왕 때 왜적의 장수가 칼로 지리산 성모석상의 코와 귀를 자르자 그 장수의 코와 귀가 동시에 떨어져 놀란 왜적장수가 달아나다 절벽에 떨어져 죽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피바위에는 그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는 듯 핏자국과 같은 흔적이 남아있다. 지리산에서 삼봉산 금강소나무숲을 가는 길에는 구불구불한 오도재가 있다. 오도재를 지나다 보면 길이 구불구불해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오도재는 그 경관이 뛰어나 어지러움을 뒤로 하고라도 이곳의 풍경을 사진 속에 담기 위해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함양 삼봉산 금강소나무길. 오도재는 전라도 광양과 경남 하동지역의 소금과 해산물을 운송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가야 마지막 왕이 은거 피신할 때 중요한 망루 역할을 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청매 등 승군이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김종직, 김일손, 유호인, 정여창 등 시인 묵객이 지리산 가는 길에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다. 누구든지 오도재에서 지리산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자면 속세의 모든 근심을 잊고 호연지기가 절로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도재에서 내려와 남원 인월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강소나무 숲을 품고 있는 삼봉산이 나온다. 삼봉산은 세 개의 봉우리인 투구봉, 촛대봉, 삼봉산을 합쳐 삼봉이라고도 불리는데 높이 1187m로 소백산맥 남단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백운산·법화산·상산 등이 있다. 쭉쭉 곧게 뻗은 금강소나무.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전 사면이 급경사를 이루어 산세가 험하다. 남쪽 산록은 백운산·지리산 등으로 이어져 지리산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상산·월경산·덕유산으로 이어져 덕유산과 연접해 있다. 삼봉산에는 우리나라 산림육종 기술을 보여주는 곳인 금강소나무 숲이 있다. 이 숲은 1963년에 임목육종연구소(현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유전자원부)에서 유전적으로 형질이 다른 강송과 해송을 접목시켜 조림을 성공시킨 남부지방 최초의 숲이다. 면적은 2ha로 그리 넓지는 않지만 숲에 들어가면 나무들은 마치 전봇대가 서있는 것처럼 곧게 자라 있다. 서부산림청에서는 삼봉산에 금강소나무 숲과 함께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비슷한 수종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유사수종 전시림을 조성했으며 인근 아이들이 숲속에서 맘껏 뛰어놀 수 있도록 지리산유아숲체험원도 만들었다. 또한 산양삼 종자를 채취할 수 있는 채종단지를 조성했으며 함양군과는 공동산림사업을 통해 산양삼, 당귀, 감초, 독활, 곰취 등을 심었다. 유아숲체험원에서 체험 학습 중인 어린이들. 수많은 이야기가 얽힌 지리산은 머나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에게 그 품을 내어주고 있다. 그 웅장하고 자애로운 지리산의 품 안에는 마치 그 기세를 보여주는 듯이 쭉쭉 뻗은 아름다운 금강송숲이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에 오면 삼봉산 금강소나무 숲에 꼭 한번 들러 보기를 바란다. 지리산도 구경하고 삼봉산에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을 하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감과 동시에 몸과 마음이 한결 건강해짐을 느낄 것이다. [자료제공 :(www.korea.kr)]
-
찬란한 가야의 영광 되찾으러, 영호남 손 맞잡다찬란한 가야의 영광 되찾으러, 영호남 손 맞잡다 - 15일, <영호남 가야문화권 한마당> 개최… 경남․경북․전북 도지사 참석 - 김경수 지사 “가야문화, 영호남 화합의 상징… 특별법 조속히 통과돼야” - 경남도,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 내달 3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 – 칼과 현’ 특별전 영호남 3개 광역지방정부가 가야 역사와 문화 복원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경상남도는 경상북도, 전라북도와 함께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호남 가야문화권 한마당>을 개최했다. 가야사 연구복원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가야문화권 지자체간 협력을 다진 이번 행사는 경남도, 경북도, 전북도와 가야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협의회(회장 고령군수 곽용환)가 공동 주최했다. 15일에 진행된 개회식에는 김경수 경남도지사, 이철우 경북도지사, 송하진 전북도지사와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주관사인 서울신문 고광헌 사장, ‘가야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협의회’ 소속 곽용환 고령군수, 허성곤 김해시장, 백두현 고성군수, 구인모 거제군수, 문준희 합천군수, 김진기 경남도의회 ‘가야사 연구복원사업 추진’ 특별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김경수 도지사는 개회사를 통해 “가야문화가 영호남 화합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뜻깊은 일”이라며 함께 참여한 지방정부, 국립중앙박물관, 언론 등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요청한 김 지사는 “무엇보다 가야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함께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별법이 통과되면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가야사 연구복원의 제도적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행사는 경남을 중심으로 영호남 전역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와 무려 600년간 공존했지만, 삼국사 위주의 역사관에서 그동안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가야사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영호남의 상생과 협력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 기간 중에는 ‘고성 오광대(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가면극’ 등 전통 예술과 현대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다채로운 공연이 진행된다. 또한 가야의 역사와 문화 관광을 소개하는 통합 홍보관 및 지역박물관과 함께하는 가야문화유산 체험관도 운영하며, 가야유물을 3D 홀로그램으로 관람할 수도 있다. 15일 오후 3시에는 <가야문화권 지역발전 및 영호남 화합을 위한 포럼>이 대강당에서 개최된다. 경남도는 정부의 국정과제에 발맞춰 전 시군에 걸쳐 가야사 조사연구, 복원정비, 문화재 활용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또한 경북, 전북과 함께 가야의 독보적인 존재 가치 증명을 위해 ‘가야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 중이다. 등재 신청 대상은 가야고분군은 경남의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고성 송학동, 창녕 교동․송현동, 합천 옥전고분군, 경북의 고령 지산동, 전북의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등 7곳이다. 한편 내달 3일부터 90일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야본성-칼(劒)과 현(絃)> 특별전이 열린다. 지난 1991년 <신비의 고대 왕국 가야> 전시회에 이어 28년 만에 기획된 전시에서는 국보 제275호 ‘말 탄 사람모양 토기’ 등 국내외 주요문화재 1,00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이 보도자료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가야문화유산과 이정하 주무관(055-211-4553)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찬란한 가야의 영광 되찾으러, 영호남 손 맞잡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합천 옥전 출토 금귀걸이 등 가야 유물 5건 보물 지정 예고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합천 옥전 28호분 출토 금귀걸이」를 비롯한 가야문화권 출토 중요 유물 5건에 대해 보물로 지정예고 하였다. 이번 지정 예고 대상인 가야 시대 유물 5건은 1980년대 발굴조사된 합천 옥전, 함안 마갑총 고분 등 대표적인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시기는 5~6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신비의 왕국으로 알려진 가야의 생활상과 기술 수준에 대한 실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유물들로, 그동안 미진했던 가야 유물에 대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를 재평가하여 보물로서 가치를 인정했다. 「합천 옥전 28호분 출토 금귀걸이(陜川 玉田 二十八號墳 出土 金製耳飾)」 한 쌍은 1985~1986년까지 이루어진 경상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존하는 가야 시대 ‘긴 사슬 장식 금귀걸이’ 중 가장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긴 사슬 장식 금귀걸이’는 사슬고리나 S자형 금판고리를 연결하여 기다란 형태를 만든 것으로 신라나 백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야의 독창적인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형식의 금귀걸이는 대체로 5세기 가야 문화권에서 주로 유행했으며, 5세기 후반~6세기에는 일본에도 영향을 끼쳐 가야귀걸이와 유사한 작품이 다수 전래되고 있다. * 일본 규슈[九州] 지방 구마모토현(熊本縣)의 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에서 출토된 6세기 금귀걸이의 경우 합천 옥전 28호분 출토 귀걸이와 매우 흡사하여 가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줌 정식 조사를 통해 발굴되었기 때문에 출토지가 확실하고, 5세기 가야의 고유한 형태를 지닌 점, 일본에 영향을 끼친 점, 한 쌍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야 금속공예의 대표작으로 큰 의의가 있다. 「합천 옥전 M4호분 출토 금귀걸이(陜川 玉田 M4號墳 出土 金製耳飾)는 좌‧우 한 쌍이 온전히 남아 있고 무덤의 주인공이 귀에 달았던 곳에서 발견되어 실제 사용된 사실도 확인되었다. * 옥전 고분 중에는 명칭에 ‘M’자가 붙은 사례가 있는데, 이는 발굴지 주변에 큰 구릉(mound)이 있는 지역을 뜻하는 고고학 용어임 이 귀걸이가 중요한 이유는 가야귀걸이 양식의 가장 대표적이고 특징적인 양식인 가늘고 둥근 주고리(세환이식, 細環耳飾) 아래 속이 빈 공 모양의 장식을 단 것, 그 아래 심엽형(心葉形) 장식을 달고 마지막으로 산치자 열매 모양의 입체형 장식을 단 특징들을 지녔기 때문이다. * 심엽형(心葉形): 나뭇잎(보통 ♡ 모양) 모양 특히, 장식마다 금 알갱이를 테두리에 붙이거나 금선(金線) 형태를 만든 누금세공기법(鏤金細工技法), 금판을 두드려서 요철(凹凸) 효과를 낸 타출기법(打出技法) 등 다양한 공예기법이 적용되어 가야 시대 금속세공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6세기 전반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융성했던 합천 지역 가야문화를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가야귀걸이 중 보기 드물게 누금세공기법과 타출기법이 모두 다 사용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예술 가치가 높다. 「합천 옥전 M6호분 출토 금귀걸이(陜川 玉田 M6號墳 出土 金製耳飾)」한 쌍은 1991년~1992년까지 경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옥전 M6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목곽(木槨)의 남쪽에 놓인 무덤 주인공의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 옥전 M6호분은 규모가 큰 중형급 무덤으로, 보관(寶冠), 목걸이, 귀걸이, 고리자루 큰 칼(環頭大刀), 화살통, 장식 마구(馬具) 등이 함께 출토되어 옥전지역 고분 중에서도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음 출토지와 발견 위치, 함께 출토된 유물이 확실해 고고학적 맥락이 뚜렷하고 현존하는 가야 산치자형 장식을 가진 금귀걸이 중 상당히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주고리의 2단 중간 장식, 격자형 원통형 금판으로 연결된 공 모양 장식, 인(人)자형 고리에 산치자형 장식을 달고 마지막 끝을 금 알갱이로 마무리한 것은 신라 금귀걸이의 중간식 형태와 가야의 산치자형 끝장식이 결합된 독특한 혼합양식으로, 6세기 가야 지역의 교류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이다. 특히, 옥전 M6호분 귀걸이처럼 금 알갱이를 장식 끝부분에 붙인 예는 창녕 계성 A지구 고분, 고령 지산동 44-11호분과 45-1호분 귀걸이와 합천 옥전 M4호분 귀걸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가야 지역에서 널리 쓰인 기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이처럼 6세기 가야 금귀걸이의 특징을 잘 간직한 작품이자 이 시기 금속공예의 대표작으로서 의의가 크다. 「합천 옥전 M3호분 출토 고리자루 큰 칼 일괄(陜川 玉田 M3號墳 出土 環頭大刀 一括)」은 1987년~1988년 동안 경상대학교 박물관이 조사 중 발굴한 유물이다. 옥전 M3호분은 가야 고분 중 비교적 규모가 크고 도굴되지 않아 당시 최고 수장(首將)의 묘제(墓制)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무덤이다. 이곳에서 나온 대가야식 ‘고리자루 큰 칼 일괄’ 4점은 여러 점의 칼이 한 무덤에서 일괄로 출토된 최초의 사례이자, 손잡이와 칼 몸통 등을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해 삼국 시대 동종유물 중 제작기술과 형태 등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 중 국립김해박물관에 보관 중인 ‘용봉문 고리자루 큰 칼’의 경우 손잡이 부분에 가는 은선(銀線)으로 전체를 감은 후, 그 위에 매우 얇은 금박을 붙인 흔적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우리나라 전통공예기법인 ‘금부(金?)’의 일종으로, 이미 삼국 시대부터 이러한 기법이 사용되었고 그 전통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확인해준다. * 금부(金?): 금속의 겉표면에 열을 가해 얇은 금박을 붙여 화려함을 극대화한 전통공예기법 ‘합천 옥전 M3호분 출토 고리자루 큰 칼 일괄’은 가야 최고 지배층의 장묘(葬墓) 문화와 한국 전통공예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는 점,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고대사, 고고학 연구에 중요한 기준점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함안 마갑총 출토 말갑 옷 및 고리자루 큰 칼(咸安 馬甲塚 出土 馬甲 및 環頭大刀)」은 1992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마갑총(馬甲塚) 조사 때 발굴한 유물로, 무덤 주인공의 좌우에 하나씩 매장되었던 것이다. 두 유물은 함께 나온 여러 유물들에 대한 연구 결과, 5세기 아라가야에서 제작하여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철제 말갑 옷은 말머리를 가리는 투구, 목과 가슴을 가리는 경흉갑(頸胸甲, 목가슴드리개), 말의 몸을 가리는 신갑(身甲)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 말갑 옷은 그동안 여러 가야 고분에서 발견된 적이 있으나 원형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된 사례가 거의 없어 희귀성이 높다. 또한, 고리자루 큰 칼은 철을 단조(鍛造, 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모양을 만듦)하거나 철제 위에 상감(象嵌, 무늬를 새김)과 타출(打出, 철판 밑에 모형을 대고 두드려 겉으로 모양을 나오게 함) 기법이 고루 적용되어 가야인들의 철 조련 기술, 공예기법 수준, 조형 감각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철제 무구와 중장기병 전술이 확산되는 양상과 높은 수준의 철기 제작기술이 개발되고 교류된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점, 유물의 희소성과 완전성 등에서 역사‧학술‧기술사에서 중요한 유물이다. 참고로, 합천 옥전 고분군(사적 제326호)은 고령 가라국과 함께 대가야 연맹의 양대 축인 다라국(多羅國)의 최고 지배층이 묻혀 있는 공동묘역으로 1985년부터 모두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그리고, 함안 마갑총은 경남 함안군 가야급 말이산 고분군의 북쪽 구릉에 있는 아라가야의 고분으로, 1992년 건축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같은 해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하였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2차례에 걸쳐(2018.3.28./9.28.) 경상북도 등 지방자치단체와 국립박물관에서 신청한 소장품들 중 출토지가 명확하고 가야문화권의 특징이 반영된 유물 총 37건에 대해 문화재 지정이 가능한지에 대한 조사를 해오고 있다. 이번 지정예고는 그 두 번째 결과로서, 앞으로 나머지 유물들에 대한 추가 조사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면 문화재 지정을 더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문화재청은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해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체계적으로 보존‧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합천 옥전 28호분 출토 금귀걸이(陜川 玉田 二十八號墳 出土 金製耳飾)>[자료제공 :(www.korea.kr)]
-
경주 쪽샘 44호에서 1,500여 년 전 토기에 새긴 신라 행렬도 발견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는 2014년부터 진행 중인 쪽샘 44호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 발굴조사에서 신라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와 말 문양이 새겨진 토기, 44호 제사와 관련된 유물 110여점을 확인하였다. * 쪽샘: 샘물이 맑아 쪽빛을 띤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 발굴조사 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 349-3 행렬도가 새겨진 토기는 44호 호석(護石) 북쪽에서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전체 높이 약 40cm의 긴목항아리(장경호, 長頸壺)로 추정되며, 그릇 곳곳(경부頸部, 견부肩部, 동체부胴體部)에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은 크게 4단으로 구성되었는데, ▲ 1단과 2단, 4단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반복되어 있고 ▲ 3단에는 다양한 인물(기마·무용·수렵)과 동물(사슴·멧돼지·말·개)이 연속으로 표현되었다. 그림을 세부적으로 보면, 말 탄 인물과 말들이 행렬하는 장면, 기마행렬을 따라가는 인물들이 무용하는 장면, 활 든 인물들이 동물들을 사냥하는 장면과 말 탄 주인공이 개(추정)와 함께 행렬하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문양의 전체 구성으로 보아 행렬도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출토 정황상 제사용 토기로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호석(護石): 무덤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무덤 아랫부분을 둘러막은 돌 행렬이라는 큰 주제를 바탕으로 기마·무용·수렵을 묘사한 복합 문양은 현재까지 신라 회화에서 처음 확인된 사례로, 복식과 인물묘사, 동물묘사 등 내용 구성이 풍부하고 회화성이 우수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한편, 행렬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표현들이 고구려 고분벽화의 내용 구성과 유사하여 신라·고구려 대외관계 연구에도 적극 활용될 전망이다. 이와 별도로, 말 문양은 발형기대(그릇 받침대)의 다리 부분으로 추정되는 토기 조각 2점에서 확인되었다. 말이 새겨진 문양은 총 2개체로, 말 갈기, 발굽, 관절 뿐 아니라 갑옷을 입은 모습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토기에 새겨진 말 문양 중 회화 표현이 가장 우수한 사례로 보고 있다. 이외에도 44호 호석 주변에서 대호(大壺)를 포함한 다양한 기종의 제사 유물이 110여 점 출토되었다. 9점의 대호는 호석을 따라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었고, 내부와 외부에서 굽다리접시(고배, 高杯), 뚜껑 접시(개배, 蓋杯), 토제악기(토제훈, 土製壎), 토제방울(토령, 土鈴) 등 소형 토기들이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시차를 두고 몇 회에 걸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발굴로 적석목곽묘 호석 주변에서 이루어진 제사의 양상과 내용에 대한 양질의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44호의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 적석목곽묘 구조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확보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고고학적 조사 뿐 아니라 지질학·토목공학 등 학제 간 융복합 연구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한편 쪽샘발굴관은 조사 시작 단계에서부터 발굴조사 현장을 일반에 상시 공개하고, 다양한 문화 행사를 개최해 지역문화재를 적극 활용한 우수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도 쪽샘발굴관을 통해 국민에게 성과를 지속해서 공유하고 문화유산 활용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확인된 선각문 장경호 조각>[자료제공 :(www.korea.kr)]
-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국보 지정 예고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각각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경상북도 예천군의 보물 제145호 ‘예천 용문사 대장전(醴泉 龍門寺 大藏殿)과 보물 제684호 윤장대(輪藏臺)’를 통합해 한 건의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승격 예고하였다. 문화재위원회(건축‧동산분과)는 용문사 대장전(건축물)과 윤장대(동산)의 건립시기, 의미, 특징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두 보물이 각각이 아닌 일체성을 갖는 문화재이고,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 한 건의 통합한 국보로 승격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다. 예천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대 두운선사(杜雲禪師)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초암을 짓고 정진한데서부터 비롯되었으며, 후삼국 쟁탈기에 왕건과 관계를 맺으며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대장전과 윤장대는 고려 명종 3년(1173년) 국난(김보당의 난) 극복을 위해 조응대선사(祖膺大禪師)가 발원하고 조성한 것으로, 고대 건축물로는 매우 드물게 발원자와 건립시기, 건립목적이 분명하게(重修龍門寺記/1185년) 드러나 있다. 대장전과 윤장대는 초창 이래 여러 차례 수리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최근 동(오른쪽) 윤장대에서 확인된 천계오년(天啓 午年, 1625) 묵서명과 건축의 양식으로 미뤄볼 때 17세기에 수리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 동․서 방위 : 건물을 바라보는 사람 기준 대장전은 일반적으로 불교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인데, 용문사 대장전은 윤장대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건립된 건물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용문사 대장전은 다포계 맞배(책을 엎어놓은 모습)지붕 건물로 초창(1173년) 이후 8차례 이상의 중수가 있었으나 초창당시의 규모와 구조는 유지되고 있다. 중수과정을 거치면서 건축 양식적으로 현재는 17세기말 모습을 하고 있으나 대들보와 종보의 항아리형 단면, 꽃병이나 절구형태의 동자주(짧은 기둥)에서 여말선초의 고식(古式)수법이 확인된다. * 다포식(多包式): 공포를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배열한 공포 형식 무엇보다 대장전은 윤장대를 보관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경장건축(경전(經典)을 보관하는 건축물)이라는 데서 독특한 가치가 있다. * 경장건축 : 경전(經典)을 보관하는 건축물 윤장대는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회전식 경장(經藏)으로 전륜장, 전륜경장, 전륜대장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다는 공덕신앙이 더해져 불경을 가까이 할 시간이 없는 대중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윤장대는 고려 초 중국 송대(宋代)의 전륜장 형식을 받아 들여 제작한 것으로 생각되며, 영동 영국사와 금강산 장안사 등에도 윤장대 설치 흔적과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예천 용문사 윤장대만이 유일하게 같은 자리에서 846년 동안 그 형태와 기능을 이어오며 불교 경장신앙을 대변하고 있다. 대장전 내부 양쪽 옆면 칸에 좌우 대칭적으로 1좌씩 설치되어 있으며, 8각형의 불전 형태로 제작되어 중앙의 목재기둥이 회전축 역할을 하여 돌릴 수 있다. 8각 면의 창호 안쪽에 경전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특히, 윤장대 동쪽은 교살창, 서쪽은 꽃살창으로 간결함과 화려함을 서로 대비시킨 점, 음양오행과 천원지방의 동양적 사상을 의도적으로 내재시켜 조형화(① 회전축에 원기둥과 각기둥 사용, ② 머름청판 풍혈을 양각과 음각으로 조각, ③ 凹·凸과 음·양 수로 구성된 회전축 밑단의 초석부재 등) 시켰다는 점에서 뛰어난 독창성과 예술성이 인정된다. 또한, 그 세부 수법 등에서 건축‧조각‧공예‧회화 등 당시의 기술과 예술적 역량이 결집된 종합예술품이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 머름청판: 창문․창틀 아래 공간을 막아댄 널판 * 풍혈: 가구 속의 통풍을 위하여 뚫어 놓은 구멍 이처럼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는 고려 시대에 건립되어 여러 국난을 겪으면서도 초창 당시 불교 경장 건축의 특성과 시기적 변천 특징이 기록 요소와 함께 잘 남아있다. 윤장대는 불교 경전신앙의 한 파생 형태로 동아시아에서도 그 사례가 흔치않고 국내 유일이라는 절대적 희소성과 상징성에서도 국보로 승격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현재까지 우리나라는 총 24건의 국보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번에 예천 용문사의 대장전이 국보가 되면 2011년 ‘완주 화암사 극락전’ 이후 8년 만에 다시 국보 건축물이 탄생한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보로 지정 예고한 예천 용문사 대장전과 윤장대에 대하여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수렴된 의견을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지정할 예정이다. [자료제공 :(www.korea.kr)]